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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의 역사를 만나다] 고려전자 마샬, 박병윤 (1)

글쓴이 : SOONDORI

제목을 어떻게 붙이는 게 좋을까? 잠깐 고민을 했고… ‘박병윤’, 이름 석 자는 곧 대한민국 오디오의 역사와 같다는 판단에 그렇게.

2021년 5월의 마지막 토요일, 94세 연세에도 여전히 스피커 유닛과 스피커 시스템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고 계시는 박병윤 선생님의 개발실을 방문하였다. 이하, 질문 문구를 기준으로 대화를 정리한다.

○ (2년 후 오픈 예정이라는, KCC 정몽진 회장의 오디오 박물관 건립에 관한 가벼운 대화 후) 우리나라 초창기 오디오 산업에 있어서 많이 앞서 나가셨던 분이시잖습니까?

■ 대통령 박정희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들 때 “야, 전자공업도 중공업에 끼도록 하면 좋겠다. 야, 그러면 이거 오~떠케 하지?” (그렇게 알게 모르게 북한 억양으로) 그러면 법, 전자공업진흥법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제게 자문 역할을 해달라고, 외국의 법도 좀 찾아주고 외국에서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 사람, 전문가를 어떻게 모셔와야 할지, 누구를 진흥회 회장을 시킬까 그런 것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거기서부터 참여를 했어요.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김완희(*) 박사를 이야기해서 모시기로 했고 “제가 (여러 사람과) 같이, 한번 꼬셔볼랍니다” 하여… 그래서 결국은 성공했지요.

(▲ 고 김완희 박사(1926년~2011년). 이후로도 국가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시고 1982년 전자신문을 창간)
“… In September 1967, at the invita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Dr. Kim Wan Hee, Professor of Electrical Engineering at Columbia University, briefed President Park Chung Hee on promoting the electronics industry and recommended the enactment of the Electronics Industry Promotion Law, establishment and early release of promotion funds, and creation of the Electronics Industry Promotion Center. In 1968, in an extensive report, Dr. Kim submitted a detailed action plan in support of his 1967 recommendation. In 1969, the government enacted the Electronics Industry
Promotion Law and set localization and export targets in the Basic Plan for Electronics Industry Promotion (1969-1976)…  출처 : 기획재정부 발간, The Development of Korea’s Electronics Industry During Its Formative Years (1966-1979) (English)

○ 그런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선생님께서 하신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스피커, 고려전자만 기억합니다. 아? 고려전자도 아니죠. 마샬이라고… 그런데 인터넷에서 마샬을 입력하면 중국에서 만들고, 스위스 자운드 인더스트리 인터내셔널이 코디네이션 해서 그러니까 영국 마샬에 돈 주고 브랜드를 사서 만드는 중국제 디지털 앰프만 뜹니다. 그런 것만 잔뜩이죠. 박병윤이라는 이름과 고려전자, 국산 마샬은 어딘가 저 밑으로 쑥 내려가 있는 것이죠. 저는 그게 불만이라… 모아서 자료도 정리하고 그랬습니다.

■ (웃음) 네.

○ 그러면… 제가 늘 연대기가 헷갈립니다. 38선 이북, 사변 때 월남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미해군 병원에서 의료및 통역 업무를 하시고, 스피커 기술 습득 차 유학도 하셨고… ‘마샬전자 음향연구소’ 제품의 후면에는 ‘Since 1956’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외 여러 가지 시점이 거론되는데요. 1974년 고려전자 설립, 1970년대 150DX 스피커, 1983년 나이지리아 온와드사와의 플랜트 수출 거래, 1985년 동양마샬, 한국마샬 분리 등… 그러다가 2003년에 왕성한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도 있었고 그리고… ‘1960년대 사업 시작’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활동 초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 (웃음) 하여튼 그렇게까지 깊이 알고 있는 분은 거의 없어요. 왜 그런고 하니 내가 구태여 자랑을 하지 않고 개발하는 모든 게 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젊었을 때는 활동을 많이 했죠. 그 당시에는 좋았어요. 전 세계가. 고급이든 저급이든 그랬지요. 당시 싼 인건비에, 일본 쪽 하청이 많았어요. 그게 그러니까… 일본이 우리를 이용한 것이고 반대로 우리는 이용을 당했어요. 기술을 공부한 것이기보다는 단순히 노동력만 제공을 한 것이지요. 돈을 버는 게 급해서. 그러다 보니까 스피커 쪽도 빨리, 많이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기술을 배우는 것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인건비가 올라가니까 중국으로 가버린 것이죠. 그래서 내 생각에는, 우리가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한 10년쯤 있다가 중국으로 넘어가서 기초가 아예 없죠? 인프라가 아예 없어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기술을 배운다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 그… 나이지리아 온와드 사와의 거래는 설비 투자도 많이 하셨더군요.

■ 그 당시에는 플랜트 수출이라는 낱말 자체가 없었어요. 그때, 외국 쇼 장에서 알게 된 기업이 우리가 당신 물건을 쓰면 좋겠다 했고 오라고 했고 정말 얼굴이 완전히 새까만 분이 와서… 그 당시에는 팩스밖에 없었다오. 미리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만났더니 연락했던 누구라고 하고 그다음에, 요거 요거 요거이 현금 주고 사서 나이지리아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해서 건넸고 현지 반응이 너무 좋아서… 수입해 갈게요. 그리고 한참 있더니 ‘아이고~! 수입해갔더니 수송비, 뱃삯으로 다 없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만들 테니 좀 도와주세요”, “그래, 도와줄게 그러면 직원들 몇 명 아예 한국으로 와서 몇 달 공부하면 가능하다, 아주 핵심적인 설비는 가져가야 한다”. 그래서… 설비를 수출하고, 반제품과 부품을 수출하고 제대로 하는가 확인도 하고… 여러 번 갔죠.

* 관련 글 : 다시 보고 싶은 국산 모델들, 동양마샬 M-802 스피커

○ 당시에는 스피커 제조가 일종의 첨단 산업이었잖습니까? 오늘의 스마트폰처럼… 그렇다면 2년 후 기업 분리는 나이지리아 온와드 거래 실패 때문이 아니었군요?

■ 당시 제가 잘못한 것이… 미국 모토롤라가 있죠? 제게 한국 대리점을 주더라고요. 좋다, 그러면 한국에서 대리점만 할 게 아니라 코스타리카에 있는 모토롤라 스피커 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코스타리카 산호세 현장을 보러 갔는데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이거를 옮기려면 내가 준비를 보통으로 해서는 안 되갔~구나” 돈도 그렇고 설비도 그렇고. 그래 가지고, 와서 땅 사고 뭐하고 그러다가 오버 했어요. 제가. 기대한 대로 안 되더라고. (투자자가) 저보다 더 많이 가져가려고 하니까. 나하고 도저히 안 맞더라고. 그래서…

○ 아이고! 한참 좋을 때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리고 그때 관여했던 핵심 인력이 남은 리소스를 가져가서 창업을 하신 것이죠?

■ 우리가 밥 먹고 살려면 마샬이라는 이름을 쓰면 좋겠다 해서. 그… 밥 먹고 산다는 기 서로 도울 수 있으면 좋은… 하여튼 그런 과정을 거쳤지요. 나로서는 너무나 잘못된 거예요. 더군다나 모토롤라 같은 회사가 저를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경영의 노하우가 부족해서, 상장을 한다거나 그러지 않고… 동업이 됩니까?

○ 엔지니어 기질이 강하셔서 그랬겠습니다. 창의적 천재… 사실 애플 하면 모두 스티브 잡스를 우선 기억하지만, 그 뒤의 워즈니악이 진짜 천재죠. 그리고 한국마샬은 여전히 활동 중이시고… 삼미 하고는 관계가 어떠했습니까?

■ 삼미하고… 거의? 내가 1년인가 얼마 먼저? 그 양반이 일본 웨스톤이라는 회사의 한국 대리점을 하고 나는 처음서부터 국산화를 하느라고… 조금 더 어렵죠? 그때 농어촌에 라디오 살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암푸를 하나 놓고 전화선을 끌어다가 아주 후진 스피커를 달고 뉴스를 듣고 그러면서 돈을 받는 사업이 있었습니다.

○ (웃음) 케이블 방송 같은 초창기 유선 방송사업이었죠?

■ (웃음) 맞아요. 돈 받고. 그때 삼미는 수입을 하고 나는 오메가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가지고 국산화를 했는데 내 꺼가 거의 비등한 수준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상공부에서 나를 불러. “당신이 정말 국산화를 했소?”, “와서, 현장에 와서 보세요” 그러니까… 당시에는 외화가 상당히 귀했거든요. 우리 이렇게 어려울 때 외화를 소모할 필요 없이 스피커를 수입 금지 품목으로 올리겠다고… 그게 나 혼자 다 해 먹으라는 이야기예요.

(웃음) 그게 가서 무슨 로비를 한 것도 아니고… 상공부 공무원 중에 굉장히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그래 가지고 삼미가 처음에는 날 굉장히 나쁘게 봤다고. 가서 쑤셔가지고 수입 금지 시켰다고. 난 전혀 관심도 없었는데. 그래놓고는 중단이 되니까 자기들도 국산화를 하겠다고 했고 곧바로 못하니까 부품으로 수입을 하더라고. 일제를 조립만 하더라고. 그래가지고 둘이 라이벌이 되었는데… 계속 라이벌로 갔죠.

그런데 한번은… 아프리카 콩고가 코발트 광산으로 유명합니다. 그곳에 공산 정권이 들어섰어요. 그때 소련하고 짝짝꿍이 돼서, 소련하고 콩고하고 몇 나라만 코발트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나라는 매장은 조금 있었지만 양산을 못 했고. 독점을 했다고. 그래서 가격을 올리니까 공급이 안 되는 거라.

○ 알니코(AlNiCo) 자석의 원료잖습니까?

■ 코발트가 30~40% 정도 들어가야 되요. 그거가 공급이 안 되니까 모든 스피커 업체가 문 닫게 생겼다고. 그런데 나는, 참… 사람이 운대가 있는 것 같아요. 자석, 쇠를 만드는 히타치 금속이라는 회사에 갔더니 “박 사장, 우리가 화란 필립스하고 기술 제휴해서 훼라이트 공장을 세웠소. 시제품도 만들었는데 이게 알리코보다 쌉니다. 그런데 지남철 힘은 더 쎄요.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 준비를 해보세요” 그래?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래가지고는 샘플, 기술자료를 가져와서 열심히 공부해보니까 알겠더라고.

그런데 갑자기 코발트 시세가 몇 배를 뛴 거야. 스피커 시장에 동이 나는데 나는… 다들 나한테 와서 사가. 그때 삼미는 제대로 못 팔고 나는 만드는 대로 나가더라. 그래서 국내 시장을 독점했어요. 그게 돈이 되었고 기술을 더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 그러면 그렇게 잘나가던 시절, 국내 스피커 산업의 태동기에 시장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 하도 오래되어서… 그 당시 한참 장전축이, 그러니까 천일사 별표 전축, 성우전자 독수리표, 활표 전축 등등해서 6개 정도가 있었는데 그 시장이 거의 나에게 의존해서 그러니까 알니코 다음에 훼라이트가 나왔는데 가격이 쌌고 자력이 좋았어요. 그러니까 못 만들어서 못 팔았다니까. 카세트 만드는 사람들도 나에게 와서 사가고. 그러니까 이게 운대라는 게 있구나,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히타치 같은 데서 나한테 그런 정보와 자료를 주고… 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 그것은 선생님께서 늘 탐구를 하시고… 파트너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 아마 사기꾼이었다면… 그래서 그런 좋은 조건에서 스피커에 손을 댓고 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6.25 휴전 끝나고 난 다음에, 정말 가난할 때, 농어촌이고 시내고 판잣집 태반일 때, 라디오 못 들으니까 케이블 장사를 할 때, 그 무궁무진한 수요를… 삼미하고 단둘이서 했으니까. (먼저 국산화를 했기 때문에) 싼 게 더 많이 나가더라고. 그래가지고는 그때… 그냥… 어쨌든 신났죠.

그런데 스피커에 깊이 들어가니까 어려워요. 이게… 모양만 내는 것은 누구나 하는데 잘 만드는 것은 어렵구나. 내가 제대로 공부해서 해야겠다. 아이구, 그래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공부하러 가자. 그래서 (알텍 인사가 소개한) 시카고에 있는 중소기업에 가서…

○ 그게 몇 년도쯤일까요?

■ 70년대 초… 60년 중반 같아요. 그때,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구나. 좋은 것은 그냥 공짜로 생기는 게 아니다. 공부하고 알아야 되겠다. 정말 운이 좋아서 알텍에 갔는데 중국 사람이 중역으로 있더라고. 같은 동양 사람이라 내가 가서 사정을 했지요. “나는 한국에서 스피커 사업을 하는데 너무 어려운 일이니 당신네들이 좀 도와다오” 그랬더니 “글쎄? 우리 회사 체제가 워낙 크니까, 내가 당신을 직접 도와주는 것보다는 도와줄 수 있는 전문 업체를 소개시켜 주겠소” 그래서 거기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위에서 소개를 해주니까 아주 쉽게 접근이 되더라고.

그리고 내가 운이 좋아서… 마산 미군 병원에서 군속으로 일을 하다 보니 영어가 완전 숙달이 되었지요. 미군 해군 장교들하고 같이 밥 먹고 자고.. 한국 해군하고 한국 해병대 치료를 하려니까 통역이 필요했던 것이고 마침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으니까,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월급 주고 PX 들어갈 수 있는 권한 주고, 찦차도 내주고…”어이구 그것을 제가 어떻게 마다합니까? 가겠습니다!”

24시간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 출신) 의사들 하고 대화를 하니까 영어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요. 브리티시 잉글리쉬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그게 큰 자산이 되어서, 나중에 시카고를 가니까 “선생님, 어디서 이런 고급 영어를 공부하셨습니까? 미국식 영어가 아니네요?” 묻기도 하고. (큰 웃음) 아무튼 그런 바람에 외국어 소통이 가능하니까 스피커를 쉽게 공부하게 되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것도 다 운이예요.

○ 저도 느끼는 게 있지만 운은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 시카고에 가니까 스피커 분야별 전문가가 따로 있더라고. 거긴 다 소개를 해준 거야. “이 질문은 나보다 저 선생님이 더 잘 아니까”라고 하며 (다른 이를) 소개를 시켜주더라고. 그 당시에는 한국을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저 밑에 있는 미개발국가 정도로, 이거 가르켜주어봤자 잘 모르겠지? 그런 식.

참… 난 그런 면에서 운이 따랐다. 그래서 고급 스피커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내가 쉽게 공부했다. 알텍을 통해서, (소개 받은 시카고 소재) 중소기업을 통해서, 또 기본 소재를 만드는 공장에서 전부 협조를 받고 그런 것이 남들은 갖지 못한 자산이 되었다. 지내 놓고 보니까 내가 참, 젊을 때 시간 잘 보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호기심이 많아가지고, 젊으니까 머리도 빨리빨리 돌잖아요? 한번 딱 보면 기억에 남을 정도로…

○ 명석한 천재가 아니고는… 저도 스피커를 몇 종 만들어 보았습니다. DIY로요. 시뮬레이터가 있고 계측기도 있고 심지어 인두도 더 좋은 것을 쓰고 부품도 좋고… 요즘은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것을 다 어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비싼 유닛을 쓰고 걸쳐 놓고 듣고 비싸, 비싼, 비싸게 팔아요.

■ 그걸 소비자가 받아가요. 모르니까 그렇죠.

○ 싼 재료를 써서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게 제작 정신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아니면 유닛을 직접 만들던가…

■ 본래 유닛을 만들어봐야 해요. 그게 아니면 반밖에 못 하는 거예요.

○ 제가 선생님의 유닛을 뜯어보았잖습니까. (망가진 150DLX 트위터에 대한 수리 과정 설명) 알루미늄 다이어프램에, 그 스피커 네트워크 구현 품질도 대단히 좋던데요.

■ (의미 있는 미소) 하여튼 그분들이 영국에, 독일에 소개를 시켜주고 전시회에 나가니까 한국 대리점을 해주세요, 의사소통을 좀 해주세요… 내가 바이어가 되니까 자기 공장을 완전 오픈시켜줘요. 무슨 질문이든 받아주고 그래서 큰 외국 회사가 내 선생님이 되었다고. 모르는 것 질문하면 감추지 않고 다 알려줘요. 자기 물건 팔아먹으려니 답을 주고… 그것도 다 언어소통 능력 덕분이죠. 그래서 내가 좋은 선생들을 잘 만났구나. 그것은 미국에 있는 선생들 덕분이다. 소개에 소개를 받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죠.

자, 이거를 어떻게 하지? 내 대에서 끝내면 이건 너무 아깝다. 누군가, 2~3년만 열심히 훈련시키면 이것을 유지하면서 뭔가… (장인과 제자 관점에서 노하우를 전수받을) 사람을 찾고 있는데 아직은 못 찾고 있어요.

* 관련 글 : 다시 보고 싶은 국산 모델들, 고려전자 마샬 MINI-150DLX 스피커 (1)

○ 제가 글에 쓰겠습니다. (웃음) 현재는 소량 단품, 장인의 스피커를 만들고 계시는 형국이죠. 나이가 드셔서 예전처럼 대량 생산은 아니겠고요. 장인의 명맥이 끊기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산업분야에서조차…

■ 하여튼, 내 젊은 시절 잘 지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봤고… 누가 봐도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온갖 고생, 죽을 고비를 넘기고. 피난 나올 때 민간인을 오인한 제트기 기총 소사에서 살아남았고 고향 원산에서 발진티부스에 걸렸는데 자기 체력으로 이겨내고 살아남았고 일본놈이 도끼로 이마를 찍었는데 (상처를 보여주심) 살아남고…

○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중공군이 막 밀려 내려올 때 미군이 무기고 뭐도 다 버리고 떠났다가 나중에 원산을 빙 둘러싸고 맹폭을 했어요. 그래서 원산폭격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고… 남으면 죽는 거죠. 미처 소지품 챙길 정신도 없이, 옷만 입고 온 가족이 뛰쳐나왔지요.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했는데 전갈이 없는 것을 보면 거기에 살아남은 식구가 없다… 나만 혼자 살았구나…

(내용 추가, 2021.06.11, 06.07 대화) ○ 선생님 몇 가지만… 듣자니 원래 북에서 의전을 졸업하시고 인민군 부대에 들어갔다고 하시더라고요.

■ 인민군으로 들어오라고 입대 명령이 왔어요.

○ 자, 그렇게 된 거죠. 말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 장교 계급을 주고 군의관으로 와서 머이~가, 입대하라. 제가 이 체제는 아니구나. 도망가야겠다. 잡히면 반동으로 죽거든요. 사형을… 잠깐 피하는 건데 왜 못 해? 하고 아무 돈도 준비 안 하고 옷도 여벌도 없고 가져나온 사진도 없고… 1주일 갔다 오면 되요 하고.

○ (모든 업력과 삶을 통틀어서)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요… 오디오 입문할 때 인켈 앰프를 하나 샀습니다. 부품들 막 누워있고… 일제 앰프를 갖고 있었기에 비교를 해보고 “뭐야 이게!” 폄하하고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랬던 행동이 너무 미안한 거예요. 당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피와 땀, 노력이 녹아 있는 것인데… 그러면서 시선을 돌려보니까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반드시 Made in Korea를 넣습니다. 해외 인터넷 검색자를 위해서요. 조금 뒤늦게 (대표적인 국산) 마샬 스피커를 인지하고 박병윤 선생님을 알게 되고… 정말 굉장한 분이세요. 연세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정신으로 자기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몇백만 명 중 한 명이 아닐까 하는…

■ 옛날에 알던 엔지니어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상당히 다 현직에서 물러났고 죽었거나 활동하지 않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일부 나이가 많아도 하는데… “야, 네가 살아 있구나! 야, 이거 기적 같은 일이다” 미국에 있는 내 아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연락하나 봐요. “야, 박이 아직 살아 있다고”… 지금 보니까 내 나이의 엔지니어들이 거의 없어요. 보면서 내가 운이 아직도 좋다. 기억력도 예전 같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 50대, 그 젊었던 시절의  사진. 대략 1980년대 중반이겠다. 출처 : https://m.cafe.daum.net/marshallLAB)

오~케이. 1편은 여기까지.

구글의 음성-텍스트 변환 기능을 써도 되지만 예의가 아니며… 녹음한 것을 듣고 머릿속 필터링하며 타이핑하는 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천일사에 납품하러 갔다가 “트럭 돌려!” 회군했던 에피소드, 이어진 컬럼 스피커 개발 등 에피소드는 다음 글에서.

[ 관련 글 ]
[오디오의 역사를 만나다] 고려전자 마샬, 박병윤 (2)
[제품소개] 마샬전자 음향연구소 MFR-3A 유닛
[제품소개] 마샬전자 음향연구소 K-3 풀레인지 스피커


(▲ 한국스피커연구조합이 발간한 ISBN이 없는 도서, ‘오디오-스피커 산업의 어제와 오늘’, 인터넷 사이트, ‘이영동의 오디오 교실’에 있는 내용과 일부 중복된다. 이영동 선생님이 참여하셨을 것이니 당연? * 관련 글 : 평론가 이영동의 오디오 생활)

(▲ 대화 중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천일사 납품 회군과 컬럼 스피커 제작 에피소드의 착안점)

 

4 thoughts on “[오디오의 역사를 만나다] 고려전자 마샬, 박병윤 (1)

  1. 잘 읽었습니다.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하신 모습이 반갑습니다.
    아흔 넷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번뜩하는 것이 있어 저도 조만간 찾아뵐 예정입니다.

    +
    그렇다면.. 결국 해외의 마샬과는 이름만 같지 전혀 관련 없는 기업인가요? 왜 이름이 마샬인지 관련 이야기가 있으면 2편에서 부탁드립니다.^^

    1. 네.

      방문하시면 좋습니다.^^

      왜 마샬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는지를 질문드렸습니다.

  2. 글 잘 읽었습니다.
    스피커를 하나 구해서 듣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큰 교감이 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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